우석균_20100615_칠레_십장은 가고 주인이 되돌아왔다

2011-03-03l 조회수 2517

지난 5월 21일 칠레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는 국회에서 국정연설을 했다. 5월 21일은 1879년 이키케 전투에서 칠레가 페루에 승리한 기념일인데, 칠레 대통령은 매년 이날을 기해 국정연설을 하는 것이 관례이다. 국회를 상대로 한 대통령의 중요한 전통적 의례이고, 3월에 취임한 피녜라로서는 집권 후 자신의 청사진을 공식화시키는 첫 대 국회 연설이며, 2월 27일 대지진과 뒤이은 쓰나미로 초토화된 콘셉시온 일대의 재건 관련 법안과 관련해서 여소야대 국회에 협조를 부탁해야 할 상황이었다.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재건 및 기부혜택 법’(Ley de Reconstrucci?n e Incentivo a Donaciones)의 처리는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재건의 방향성을 둘러싼 신랄한 문제 제기도 있었고, 단순히 정략적인 차원에서의 발목잡기도 있었지만, 500명 이상의 사망자, 80만 명의 이재민, 300억 달러에 이르는 피해액을 남긴 50년만의 대지진이 남긴 상처가 너무나 커서 그 누구도 반대의 목소리를 크게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피녜라가 내건 야심찬 목표였다. 피노체트 이래 첫 번째 우파 대통령이지만 독재 정권과 결부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피녜라로서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이전부터 탈이념을 표방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경제에 올인하고자 했다. 그래서 5월 21일 피녜라의 청사진도 경제 목표 일색이었다. 요약하자면 피녜라는 연평균 6%의 경제성장, 5년간 일자리 100만 개 창출, 현재 14,000달러인 1인당 국민소득을 2015년에 22,000달러로 끌어올려 남유럽 국가들보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피녜라의 목표가 너무 장밋빛 전망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 즉각 뒤따랐다. 국민총생산의 17%를 차지하는 콘셉시온 일대가 지진으로 입은 막대한 피해, 그 복구에 막대한 재원을 소진해야 하는 현실, 전 세계적인 더블 딥 신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각해진 유럽의 재정위기, 여소야대 국면이 필연적으로 야기할 한계 등을 안고서 피녜라가 이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피녜라가 퇴임 시에 자신의 목표를 다소 밑도는 성적표를 내민다 해도 크게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지진과 외부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IMF는 2010~2014년 5년 동안 칠레가 연평균 4.9%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2015년 1인당 국민소득이 19,000달러에 이르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즉 피녜라가 지난 20년 간의 콘세르타시온 정권의 정책 기조만 유지해도 기본 성적은 올릴 수 있을 것이고, 여전히 칠레가 성장한다는 믿음을 지닌 대다수 국민은 피녜라의 성적표가 그의 목표치에 미달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성장이 진정한 성장인가 하는 것이다. 지진과 쓰나미 이후 콘셉시온 일대에서 벌어진 일들은 칠레 모델의 한계를 노출했다. 일례로 지진 발생 직후에 일어난 소위 약탈에 참여한 대다수 사람들은 굶주린 일반인들이었다. 구호품 배급은 지연되고, 식품과 의약품 상점들은 문을 굳게 닫은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약탈’에 참여했을 뿐이다. 그리고 상점들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은 기업들이 식품과 의약품을 독점 혹은 과점하고 있는 칠레 경제 상황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칠레 지진을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지진’이라고 정의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런데 피녜라에게 지진은 여전히 자연재해일 뿐이다. 그래서 이번 지진에서 적절하고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내무부 산하 국가비상실(ONEMI: Oficina Nacional de Emergencia)의 대대적인 재편, 이재민을 위한 주택 건설과 일자리 알선, 복구 재원 마련을 위한 일시적인 법인세 인상과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 등을 통한 조속한 재건에 착수하면 국가의 의무는 다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칠레 경제 구조가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성장률, 국민소득, 일자리 개수에만 집착한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사회적 지진’의 피해는 증폭되고 있다. 지진으로 해당 지역의 일반 국민과 중소기업은 고사 직전이다. 하지만 피해지역 재건은 Sodimac, Easy, Construmart 등의 대기업이 주로 담당할 것이다. 재건사업의 경제적 이익이 고스란히 대기업으로 돌아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세 기업 모두 피녜라 정부의 주요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문제이다. Sodimac은 지주회사 팔라벨라(백화점 체인) 계열사인데, 현 외무부 알프레도 모레노가 팔라벨라의 CEO를 역임한 바 있다. Easy는 지주회사 Cencosud의 계열사인데 2000~2008년 사이의 CEO가 현 광업부 장관 Laurence Golborne이다. 또한 칠레 경제의 중추인 국영구리회사 CODELCO의 이사인 헤라르도 호프레는 Construmart의 이사이기 하다. 지진이 칠레 모델에 대해 경종을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이 더욱 심화될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이 현실에서 “십장(콘세르타시온 정부를 지칭함)은 가고 주인이 되돌아왔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