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형_20100212_아이티 원조의 국제정치

2011-03-02l 조회수 2602

 아이티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가 본격화되면서 외교전쟁도 한창이다. 야전병원 설비를 실은 프랑스 비행기는 한동안 공항에 착륙을 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프랑스 정부의 대표 주아양데는 공항 통제를 맡은 미군을 나무랬다. “아이티를 원조해야지 점령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위신도 말이 아니었지만, 유럽연합도 굼뜬 대응에 발언권을 잃어 버렸다. 협의만 하다 보니 적기에 강력한 메시지와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미국은 이번 지진을 카리브 해역의 통제권을 다잡는데 호기로 보고 있다. 이미 2천명의 해병대를 포함한 1만 2천명의 대규모 파병을 통해 구호작업에 착수했다. 30대의 비행기, 항공모함 칼 빈슨, 순양함 노르망디, 구축함 언더우드도 함께 출동했다. 미국 국방부와 남부사령부(사우스컴)가 통제지휘부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의 아이티에서 구호사업과 질서 회복 업무를 맡는다.
  중국도 지진 발생 후 33 시간 만에 긴급구호팀 68명을 급파했다. 국제구호에 경험이 많고 지리적으로 인접한 미국에 비해 겨우 10시간 정도 늦었다. 아이티는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다. 중국 지도자들은 선의를 크게 베풀고, 국교를 정상화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카리브 해는 “미국의 호수”라 불린다. 여기서 미국의 국가이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아이티에서 대량 탈출하고 있는 사람들의 미국 내 유입을 막아야 한다. 사전에 차단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 시끄런 쟁점이 된다. 인권단체들과 보수파들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행정부 시절에 아이티의 군사독재를 피해 나온 대규모 보트 피플 때문에 정국이 요동친 적이 있었다. 30만 명(추산치)의 피난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는 독재 정부를 강제적으로 밀어내는 강수를 두었다. 아이티 인들의 이민유입, 인권침해, 빈곤과 구호 문제는 오래 전부터 미국 내에서 국내 이슈화 되었다.
  둘째, 이번 기회에 시장경제 질서를 착근시키고 만성적 빈곤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동안 실추되었던 미국의 위신도 올라갈 것이고, 쿠바와 베네수엘라와 같은 반미 국가들의 위세도 위축될 것이다. 아이티의 외채 가운데 80%를 채권으로 가지고 있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이미 외채 탕감을 선언했다. IMF 총재 스트로스-칸은 대규모의 마샬 플랜을 제안했다. 세계은행 총재 졸릭은 저임금 수출가공기지로서 아이티에 주목하고 기업인들에게 이번 기회에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조만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재원이 아이티로 유입될 것이고, 이는 장기적으로 분명히 효과를 볼 것이다.  
  아이티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경쟁력이 있다. 미국 시장이 코앞에 있고, 임금은 중국보다 싼 편이다. 사회정치적으로 안정만 된다면 조립가공형 산업이 번성할 수도 있다. 이미 미 의회는 2006년에 일종의 자유무역협정인 '아이티경제개선기회법'(Haitian Opportunity for Economic Enhancement: HOPE)을 3년 시한부로 통과시킨 바 있다. 산업공단을 창설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제품에 한해서는 대미 수출 시 무관세 규정을 적용한다. 2008년 10월에 기회법(HOPE II)은 갱신되었고 2018년까지 유지된다.  
  셋째, 아이티는 인신매매, 마약거래 등 온갖 불법거래의 중계지이다. 난리 통에서도 유아 납치와 장기매매가 성행하고 있다는 외신도 있었다. 또 미국으로 유입되는 마약의 중간 기착지로 아이티의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쐐기를 박고자 한다. 멕시코와 콜롬비아와 연계된 마피아들이 이곳 거리에서 힘을 쥐고 있다.
  미국은 이제 자신의 힘만으로 카리브를 통제하기 보다는 브라질과 같은 역내 국가를 끌어들여 함께 역할을 나누고자 한다. 혼자서 북치고 장고치는 일이 힘에 겨운 것이다. 브라질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이 목표인지라, 미국의 요구를 냉큼 수용했다. 현재 유엔평화유지군에서 브라질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미국도 그 대가로 브라질에 경제적 유인을 제공했다.
  2009년 7월에 워싱턴에서는 제4차 미국-브라질 고위 경제인 포럼이 열렸다. 브라질에서는 차기 대선후보인 지우마 후세피, 개발통상부 장관 미겔 조르지가 참석했고, 백악관에서는 경제보좌관인 로렌스 H. 섬머스, 국가안보 보좌관 제임스 존스 장군이 참석했다. 미국은 회의 끝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브라질이 아이티에 투자한 의류생산품에도 무관세를 적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브라질은 12명의 경제계 대표들을 아이티로 보내 투자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또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룰라 대통령은 2007년에 공동 선언문의 제2항에서 이런 합의를 한 바 있었다. 제3국에서 에탄올 생산을 시작한다. 여기서 제3국은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산크리스토발 이 네비스, 엘살바도르"이다.  
  카리브 해역의 반미 지도자인 쿠바의 카스트로는 미국의 점령 작전을 비난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도 미국의 파병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3천명의 미군이 이미 도착했다고 읽었다. 마치 전쟁터에 가는 군인처럼 무장한 해병대들이라고 한다. 온갖 무기는 다 있지만, 정작 보내야할 것은 의사, 의약품, 연료, 야전병원이 아닌가! 미국은 비밀스런 방식으로 아이티를 점령하려 한다.” “길거리에서 그들을 볼 수가 없다. 그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던가? 부상자를 수색하던가? 당신들은 그들을 보지 못한다. 나도 보지 못했다. 대체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결손 국가인 아이티에는 지진 이전에 이미 9천 명 가량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1만 2천명의 군대가 투입되니, 9백만 인구에 2만 1천명의 병력이 주둔하게 된다. 2천 8백만 인구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미군 숫자가 7만 명이니, 인구 당 파병 숫자는 비슷한 수준이다. 그만큼 군사화의 수준이 높다. 미국은 유엔과 역내 이해관계자인 브라질과 캐나다와 협력하여 원조 작업을 조정할 것이다. 이미 국가는 붕괴되었고, 유엔의 사무소 설비도 파괴되었다고 하니, 미군 시설이 정부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 장관은 아이티 방문 시에 이런 우려를 일축했다. “우리는 (아이티 국가를) 지원하려고 할 뿐이지,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부 장관도 파병은 “무정부 상태에서 아이티 인들과 무고한 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사탕수수밭과 커피 농장의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의 압제에서 벗어나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자유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나르 쿠쉬네는 "프랑스인들과 아이티의 역사적 유대"를 강조했다. 하지만 유대는 전혀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를 포함하여 노예제를 인정하는 강대국들은 노예반란이 이웃으로 전파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자유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들은 모두 아이티와 경제관계를 단절했다.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도 아이티에 대한 국가승인을 남북전쟁 시기까지 미뤘다. 아이티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대신에 1억 5천만 프랑의 배상금(현재 150억 유로)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 채무로 인해 아이티는 재생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변제가 불가능한 이 채무를 프랑스는 곧 미국으로 넘겼다.  
  독립 이후 정치질서는 국내세력에 의한 독재가 아니면 미국의 점령으로 얼룩졌다. 미국은 해병대를 파병하여 1915년부터 1934년 사이에 근 20년간을 아이티를 점령한 바 있었다. 냉전 시대에 미국은 오랫동안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체제를 지지했다.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파파 독"(Papa Doc),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베이비 독"(Baby Doc)이라 불렸다. 아버지는 1957년부터 1971년까지, 이를 뒤이은 아들은 1986년까지 아이티를 좌지우지했다. 근 30년이나 유지된 독재가 무너지자, 장-클로드 뒤발리에는 국고에서 9억 달러를 꺼내 프랑스로 도망갔다. 당시 아이티의 외채보다 많은 액수였다.
  하지만 외세와 독재 추종세력의 힘은 강했다. 1990년 12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해방신학자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는 9개월 만에 라울 세드라스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로 망명을 떠났다. 1994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군을 보내 아리스티드를 다시 입국시켰지만, 그 뒤에도 아이티 정국은 안정화되지 않았다. 2000년에 재선 기회를 잡은 아리스티드는 점차 국내 상황을 통제하는 힘을 잃었고, 또 국제적 지지도 상실하게 되었다. 2004년에 미국은 프랑스와 캐나다의 동의아래 반대세력을 밀었고, 아리스티드는 또 나라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