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키르치네르 체제' 최대 위기 봉착

2008-07-21l 조회수 2802

기사입력 2008-07-18 06:41
(상파울루=연합뉴스) 김재순 특파원 =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농산물 수출세 인상안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지난 2003년 이후 유지돼온 '키르치네르 체제'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지난 3월 11일 국내 인플레 요인을 억제하고 사회개발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농산물에 대한 수출세를 30~35% 인상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사회개발기금을 조성해 병원 시설 확충에 50%, 서민주택 건설에 20%, 농촌지역 도로 포장에 20%, 가족농가 지원에 10%를 사용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다. 사회개발사업에 대한 투자 환원으로 전체 농민의 85%는 수출세 인상에 따른 부담이 거의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농업 부문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면서 4개월 이상 격렬한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는 갈등을 초래했다.

곡물 반출 중단과 고속도로 점거 시위는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비롯한 대도시에 대한 식료품 및 연료 공급 부족 사태를 빚으면서 오히려 인플레율 상승을 가져왔으며, 중산층이 냄비와 프라이팬을 들고 거리 시위에 나서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농산물 수출세 인상 조치를 구상한 경제장관이 사임하고, 정부가 인상폭을 완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뒤늦게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성난 파도처럼 변한 민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궁지에 몰린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달 중순 수출세 인상안을 의회로 넘겼다.

지난 5일 하원 표결에서 찬성 128표, 반대 122표로 안건이 간신히 통과되면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승리로 기우는 듯 했던 승부수는 17일 새벽 실시된 상원 표결에서 가부동수를 이룬 끝에 부통령을 겸하고 있는 훌리오 코보스 상원의장의 반대로 부결되면서 결국 좌절돼 버렸다.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03~2007년)의 후광을 업고 지난해 10월 대선에서 승리한 뒤 집권 7개월을 막 넘긴 페르난데스 대통령으로서는 '상상하기 싫었던' 코보스 의장의 선택으로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만난 셈이다.

코보스 의장은 표결이 끝난 뒤 부통령직 고수 의사를 확인하면서 "농산물 수출세 인상안에 대한 반대는 양심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말해 페르난데스 대통령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집권 페론정의당 대표인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으로서도 중앙 정치무대를 장악한 이래 5년만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지난 2003~2007년 사이 연평균 9%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바탕으로 야권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키면서 정부와 집권당 내에 막강한 영향력 구축을 통해 자신만의 정치적 공간을 넓혀온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도 이제 스스로 변화를 모색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특히 두 사람 모두 파업과 시위를 벌이던 농업 부문을 향해 "정부 전복을 시도하는 쿠데타 세력"이라는 비난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점에서 수출세 인상안 부결은 참담한 패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정부와 농업 부문의 갈등이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 전개된 데는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이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강경일변도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고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대한 반발은 불신의 벽을 높이면서 한 때 60%에 근접했던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난 1월과 비교해 30%포인트 이상 떨어져 나갔으며, 현재 20%대까지 추락한 상태다. 키르치네르 부부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한계상황에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아르헨티나 정치권에서는 부부 대통령 체제의 이완 가능성과 함께 국정운영 스타일에 상당한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치문제 분석가인 로젠도 프라가는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농산물 수출세 인상안이 상원을 통과하지 못한 것은 페르난데스 대통령으로 하여금 국정운영의 방향 전환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빠른 시간 안에 현재의 갈등을 더 심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합의를 찾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대통령직을 부인에게 넘긴 뒤에도 실질적인 대통령 행세를 해온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의 위상 약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어 아르헨티나 정치권에서 앞으로 상당한 변화와 진통이 예상된다.

fidelis21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