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美’ 카리브해 신냉전 격전지로

2008-07-28l 조회수 3175


기사입력 2008-07-26 02:21 
[서울신문] 중남미 카리브해가 신냉전의 전초 기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오랫동안 지역 주도권을 행사해온 미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러시아, 이란 등 미국과 긴장관계에 있는 국가들은 야금야금 세를 넓히는 중이다. 여기에 남미 좌파의 좌장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이끄는 석유동맹 ‘페트로 카리브’의 세력 확장도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한때 미국의 앞마당으로 여겨져온 카리브해가 신냉전의 격전지로 변모하고 있다고 24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 언론은 최근 러시아 정부가 베네수엘라와 쿠바에 군사 기지를 설치할 계획이라는 보도를 잇따라 내보냈다. 인테르팍스통신은 23일 러시아를 방문중인 차베스 대통령이 자국내에 러시아군 기지의 설치를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이번 방문에서 10억달러 상당의 러시아 무기 구입 계약을 비롯해 양국간 군사협력 강화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일간 이즈베스티야는 공군 고위관료의 말을 인용해 쿠바에 핵폭격기 기지를 세우는 방안을 고려중이라고 21일 보도했다. 미국의 동유럽미사일방어(MD)계획에 맞선 대응전략 차원이라는 분석을 곁들였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정부는 공식적으론 이같은 보도를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러시아가 남미를 워싱턴과의 힘겨루기를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은 확실히 감지된다.“쿠바에 공군 시설이 설치되더라도 군사 기지가 아니라 중간 급유 시설이 될 것”이라는 러시아 국방장관의 말은 러시아가 남미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의 코앞인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을 설치한다면 러시아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한 것이라고 타임은 분석했다.

베네수엘라가 만든 중남미와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의 석유 동맹 ‘페트로 카리브’도 부쩍 탄력을 받고 있다.2005년 출범 당시 14개 회원국에서 현재 18개국으로 늘었다. 고유가 시대에 연 1%금리,25년간 장기상환 조건으로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를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최근 들어 바베이도스 같은 친미 국가들도 가입을 희망하고 있다. 석유를 무기로 반미 성향의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려는 차베스의 야심이 고유가 덕에 힘을 얻고 있는 셈이다.

핵개발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란도 니카라과,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남미 국가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카리브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지각 변동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잘못된 남미 정책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타임은 지적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미국이 이 지역에 대한 경계태세를 지속적으로 늦춰온 데다 부시 행정부도 남미에 관심을 덜 쏟으면서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무너지고 다극체제가 들어설 여지가 만들어졌다는 분석이다.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의 조하나 멘델슨 포맨 선임연구원은 “페트로 카리브와 경쟁하기 위해선 카리브해 연안국가들에 바이오연료 생산 지원, 폭력사태 억제, 환경재앙 대비책 등 다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환경 난민이 발생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지역에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