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와 멕시코

2011-12-22l 조회수 3606


김 은 중(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2012년에는 멕시코에서 대선이 치러진다. 2006년 선거에서 집권한 펠리페 깔데론 대통령은 부정투표의 구설수에 휩싸이면서 거센 사회적 저항에 직면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역전시키려는 목적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깔데론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깔데론 정권은 몇 가지 정당성을 내세웠다. 첫 번째 정당성은 이제 멕시코가 단순히 마약이 운반되는 이동로가 아니라 마약 소비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 마약이 크게 확산되고 있으며 이는 우려할 만한 수준임을 강조했다. 두 번째로 내세운 정당성은 마약과 관련된 폭력이 크게 증가했고, 이 때문에 사회적 불안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정당성은 마약카르텔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범죄가 지역에 따라서는 공권력을 무력화시키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5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주장은 근거 없음이 드러나고 있다. 먼저, 멕시코 당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나 세계 수준과 비교할 때 인구 비례 당 멕시코의 마약 소비는 매우 낮은 수준이다. 최근 10년 동안 마약의 소비증가는 미비하며 이러한 증가도 청소년들의 경우가 아니라 성인들의 경우이다. 멕시코에서 마약은 소비보다는 비싼 값에 미국에 팔기 위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마약 때문에 폭력이 증가했다는 두 번째 이유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2007년 이전의 10년 동안 멕시코에서 살인사건의 발생 건수는 감소하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범죄 유형도 경제적 빈곤에서 비롯된 절도, 습격, 납치가 주류를 이루었고 잔혹한 살인 사건들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마약과의 전쟁이 선포된 이후였다. 멕시코의 사회정치적 구조와 관계된 세 번째 이유도 마약과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마약정치(narcopol?tica)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주장하듯이 마약카르텔은 결코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지도 않았고 공권력을 대체하려는 무모함을 보이지도 않았다. 부패의 고리로 연결되어 권력과 공생하지만 언제나 정치권력의 하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약과의 전쟁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다.

 멕시코의 시인이자 언론인이면서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평화운동”의 지도자인 하비에르 시실리아(Javier Sicilia)는 칠레 언론(Clar?n)과의 인터뷰에서 마약과의 전쟁은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이 가져온 결과임을 강조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지표들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멕시코 인구의 약 51%에 해당하는 5,480만 명이 빈곤층인데(2009년 6월 기준), 2006-2008년 3년 동안 590만 명이 빈곤층으로 추락했고, 2009년에만 420만 명이 새롭게 빈곤층에 편입되었다. 2008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약 1,000만 명의 빈곤층이 발생했는데(세계적으로는 약 1억 명의 빈곤층이 발생했다), 그 중 50%가 멕시코 사람들인 셈이다. 2006-2009년까지 4년 동안 빈부격차는 더 커졌으며 상위 10%가 차지하는 소득은 35.4%에서 41.3%로 증가했다. 멕시코 사회발전정책평가국가위원회(el Consejo Nacional de Evaluaci?n de la Pol?tica de Desarrollo Social)의 보고에 의하면 빈곤층 발생의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멕시코가 수입에 의존하는 곡류와 옥수수, 육류의 국제가격 상승이었다.

 경제지표 악화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더 심각한 현상이 발견된다. 멕시코의 15-29세 청소년들 중 722만 6천 명이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직업도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멕시코에서는 이들을 ninis라고 부른다). 이러한 수치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속하는 34개 국가 중 3번째에 해당하고, 젊은 여성의 경우에 한정하면 첫 번째이다. 학교에 다니는 경우에도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는데 입학생의 45%만이 제대로 학교를 졸업할 뿐이다. 또한 멕시코는 국내총생산 대비 교육재정이 최하위에 속한다. 보고서는 멕시코보다 더 열악한 국가로 터키와 브라질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길거리의 소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밀입국이거나 마약범죄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원주민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원주민 10명 8명이 빈곤층 내지 극빈층으로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10명 당 8.5명) 다음으로 열악한 상황이다.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은 후기 근대에 해당하는 현대사회를 ‘위험 가득한 풍요의 시대’라고 불렀다. 그가 사용한 위험(risk)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스페인의 항해술 용어로 ‘위협을 감수하다’, ‘암초를 뚫고 나가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벡이 말하자고 한 것은 근대성은 인류문명이 나아가야 할 운명이기 때문에 성찰성(reflectivity)을 통해 최대한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찰성이란 사회적이고 과학적인 합리성을 뜻한다. 그러나 지금 멕시코가 처한 위험은 사회적이고 과학적인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이다.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표면적 구호 뒤에는 구조적 폭력의 문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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