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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가스 요사

2011-03-03l 조회수 3843

바르가스 요사

우석균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1936~)가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90년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그 다음은 누가 될 것이냐를 논할 때, 시인으로는 에르네스토 카르데날(니카라과)과 니카노르 파라(칠레), 소설가로는 바르가스 요사와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가 거론되었으니 20년 만에 예언이 실현된 셈이다.

그러나 바르가스 요사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킨 사건이다. 그래서 그의 수상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라틴아메리카 외부에서 바라보면 잘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르가스 요사는 박학다식하고 글쟁이 중의 글쟁이답게 베스트셀러를 수없이 썼다. 게다가 노벨상위원회는 권력에 대한 신랄하고 예리한 비판,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개인의 처절한 저항(때로는 처절한 패배)이 담긴 작품들을 쓴 작가라는 점을 선정사유로 꼽았으니 이는 바르가스 요사가 ‘행동하는 지성’임을 인정한 것이니 말이다.

사실 바르가스 요사의 비판은 좌와 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71년에 쿠바 문인 에베르토 파디야의 자아비판 사건이 일어나자 바르가스 요사는 누구보다도 더 이를 강력 비판하였다. 아직 쿠바혁명이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시점이었는지라 바르가스 요사는 이들의 공적이 되는 것을 감수한 행동이었다. 또 1990년에는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 하에 있던 멕시코를 공산주의 체제보다 더한 독재로 묘사하여 멕시코 국민의 공분을 샀다. 그것도 멕시코 방송에 출연해서, 또 몇 달 뒤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멕시코 문단의 원로 옥타비오 파스 앞에서 한 용감한 발언이었다. 또한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독재와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가스 요사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부지기수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 무수하게 출현한 지식인, 어쩌면 바르가스 요사가 공격하는 독재자나 포퓰리스트보다 더 많이 존재한 친(親) 서구 지식인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이념적 경직성이나 언행 불일치 문제를 비판했다. 문제는 좌파의 무능력, 폭력, 표리부동에 환멸을 거론하면서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서구 가치를 유일한 진리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A(라틴아메리카)가 나쁘니 B(서구)가 정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적 비약이었다.

인권과 민주주의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바르가스 요사가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가 보편적 인권과 보편적 민주주의인양 믿고 있다는 데에 있다. 가령, 라틴아메리카 문인 중에서 바르가스 요사만큼 친 신자유주의 발언을 많이 한 사람도 없다.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그는 신자유주의자일 뿐이지 결코 인권과 민주주의의 전도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가령 바르가스 요사의 회고록 ????물속의 물고기????(El pez en el agua)를 보면 왜 그가 많은 사람에게 공분을 사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1990년 대선에서 충격의 역전패를 하고 정치에서 문학으로 복귀하면서의 소회가 잘 드러나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는 그에게 승리한 후지모리의 정책이 자신의 대선 공약을 상당 부분 모방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페루 정치와 국민에 대한 환멸을 토로한다. 즉 자신의 공약이 옳았는데도 자신을 포퓰리즘의 희생자로 만드는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지모리가 누구인가? 바로 페루에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후지모리가 베꼈다고 바르가스 요사가 지적하는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전형적인 친시장 정책이었다.

만일 바르가스 요사가 자신의 진정한 패배 이유를 깨달았다면 진정한 행동하는 양심으로 재탄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패배를 라틴아메리카의 낙후된 현실로 지목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서구 가치의 도입을 더 강력하게 주장했다. 환영받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결코 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패배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 페루 대선은 바르가스 요사가 압승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현 대통령 알란 가르시아의 5년 동안의 무능과 부패로 중도좌파 강령의 집권당 APRA는 필패할 수밖에 없는 선거였고, 좌파는 강력한 구심점이 없었던 데다가 제도권 밖의 혁명단체 센데로 루미노소의 과격한 혁명노선 때문에 덩달아 민심을 잃고 있었다. 당시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바르가스 요사가 상대적으로 상처가 적은 우파를 규합하여 대선에 나섰으니 압승이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선 초기 불과 1%대의 지지율에 머물던 후지모리가 최종 승리자가 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변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그 중에는 바르가스 요사에 대한 흑색선전도 큰 몫을 차지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르가스 요사가 원주민과 안데스인의 눈에 자신들을 대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비쳤다는 점이다. 백인의 외모이고(사실은 메스티소이지만), 외국에 오래 거주했고, 리마(해안지대)에 근거지를 둔 인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서구적 가치의 정책을 주장했으니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페루의 타자였던 이들을 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득권층 출신이 아니면서 소수인종인 후지모리가 어부지리를 얻었다.

1990년대부터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처럼 원주민 비중이 높은 안데스 국가에서 원주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당선이 힘들게 되었다. 후지모리 다음 대통령인 톨레도와 현 볼리비아 대통령 모랄레스는 원주민인 것만 봐도 그렇다(비록 톨레도는 겉모습만 원주민이고 의식구조는 백인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1920~30년대의 페루와 에콰도르 혹은 1950년대의 볼리비아에 원주민주의가 고조되었다가 그 열기가 꺾였듯이, 최근 안데스 국가들의 정치 현상도 일시적인 이상 현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90년대의 상황은 과거와 크게 다르다. 1970년대에 페루와 에콰도르에서는 원주민들이 마침내 투표권을 얻었고, 원주민운동의 지도자들도 과거와 달리 외부인사들이 아니라 원주민 자신이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부침을 겪는 와중에서도 소수자의 목소리를 크게 신장시켜 마침내는 오바마처럼 백인 아닌 사람도 대통령이 되는 시대를 열기까지 반세기가 걸렸다면,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운동은 불과 10~20년 만에 원주민 대통령을 당선시키고, 대선 때마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가스 요사의 1990년 패배의 진정한 원인은 바로 이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67년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남긴 일기에는 왜 볼리비아 농민들이 그들을 도우러 온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가 하는 개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틀림없이 바르가스 요사는 이를 좌파의 무능 내지 과격한 노선에 대한 반대라고 해석할 것이다. 하지만 센데로 루미노소가 테러집단에 가까운 폭력을 휘둘렀는데도 불구하고 한때 세력을 떨친 이유가 해안-안데스의 격차에 대한 안데스 주민의 오랜 피해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바르가스 요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원주민주의 소설가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가 반서구라는 케케묵은 이상에 사로잡혀 ‘아름다운’ 거짓말만 남발한 작가가 아니라 원주민들에게는 노벨문학상 감이라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했다. 체 게바라가 계급 논리에 빠져 원주민이라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해서 협조를 이끌어낼 수 없었듯이, 바르가스 요사는 서구 가치에 빠져 똑같은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노벨상위원회도 바르가스 요사를 수상자로 결정하면서 똑같은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그들의 눈에 인권과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바르가스 요사는 너무나 존경스러운 인물이었을 테니.
<2010.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