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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대선, 좌파의 승리?

2011-09-23l 조회수 2873

페루 대선, 좌파의 승리?

강정원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6월 5일 치러진 페루 대통령 결선 투표는 대선 재수생인 오얀타 우말라의 승리로 돌아갔다. 개표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국내 포털사이트에는 “중남미는 ‘중도 좌파’ 세상”(서울 경제 6월 6일자)이라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올랐고, 당선이 확정되자 CNN과 BBC 등 외신들은 우말라의 승리와 페루주가지수 폭락을 주요 기사로 내보내며 새로운 좌파 정권의 탄생이 투자자에게 미칠 손익 계산에 골몰하는 모습이다. 결선 후보였던 게이코 후지모리(이하 게이코)와의 접전 끝에 불과 3퍼센트의 표차로 확정된 우말라의 승리를 페루 민주주의의 성과로 호평하면서도 이들 언론들이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말라는 괴짜 정치인?

우파 진영의 논객 역할을 자청해오던 바르가스 요사가 결선 투표를 앞두고 우말라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요사는 불과 5년 전 대선에서 우말라를 독재자라고 비난하던 자신의 독설을 망각하기라도 한 걸까? 게이코와 우말라를 “만성암과 에이즈”로 비유하며 후자를 지지한다는 요사의 설명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지만 요사의 궁색한 변명은 우말라를 선택했던 일부 유권자들의 심경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페루의 일부 분석가들은 금번 선거는 우말라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게이코를 반대하는 사람들간의 투표였다는 설명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금번 선거를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2006년 대선 당시 우말라가 정치 모델로 삼았던) 대 후지모리 전 대통령(게이코의 아버지이자 현재 부정부패와 인권유린 등의 혐의로 25년 형을 받고 수감중인)의 망령들간의 선거로 해석하는 입장들과도 일맥 상통한다. 아무리 선거란 최선이 아닌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장이라는 말로 위로한다고 하더라도 이쯤되면 우말라가 대변하는 것은 단지 환영에 불과하다는 의미인지 석연치 않은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말라와 후지모리를 대립 선상에 놓는 것은 타당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차베스 신봉자나 정치 초보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지난 대선에서 우말라가 가르시아 현 대통령과 대적하며 45퍼센트 이상의 득표를 거두었음을 고려할 때 부당한 처사이다. 또한 이번 결선에서도 페루의 19개 행정 구역 가운데 수도 리마와 카야오 및 북부 4개 구역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역들이 우말라를 선택했으며, 쿠스코, 푸노, 마드레 데 디오스와 같은 압도적인 원주민 인구로 구성된 남부 내륙 지역들에서 70-80퍼센트에 육박하는 높은 득표를 거두었다는 것은 우말라가 특정 지역들에 기반하는 확고하고 포괄적인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음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우말라의 정치적, 종족적, 계급적 기반은 여전히 모호해 보인다. 우말라를 케츄아어 사용 원주민 태생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형제지간인 안타우로 우말라와 2000년 후지모리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감행하며 내세웠던 에트노카세리스모(etnocacerismo)는 최근의 다문화주의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급진적인 민족주의를 담고 있다. 그 외에도 군에 복무하던 당시의 인권유린 혐의와 동성애자를 모두 총살시켜야 한다던 우말라 어머니의 발언 등은 원주민을 포함하는 페루 소외 계층의 대변자로서 우말라의 진정성에 심각한 오점을 남게 했던 요소들이다. 설상 가상으로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대신 주변부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정체성을 포기하는 대신 우말라와 연합하여 대중적 지지를 얻어낼 것인지의 문제로 집중되었던 페루 좌파 진영의 논쟁을 떠올린다면, 우말라를 좌파진영의 대변자로 보는 데에도 무리가 있다는 견해가 제시될 수 있다.

실제로 우말라는 민족주의 또는 사회적 포용(inclusion) 등과 같은 포괄적인 용어들로 자신의 정책기조를 표명하며 페루 원주민 운동이나 좌파 운동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해왔으며, 우말라의 이러한 모호한 정체성은 이번 대선에서 차베스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브라질 룰라의 선례를 따르겠다며 입장을 선회하는 과정에서 더욱 극대화되었다. 이에 더불어 앞서 언급한 그의 기이한 가족사, 인권유린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혐의, 에트노카세리스모라는 엉성하면서도 극단적인 민족주의, 차베스와의 유착 관계 등에 관한 의혹은 그를 수식하는 카멜레온, 매브릭(괴짜, 독불장군 등을 의미) 등의 용어들에 반영되어 있다.


우말라, 차악이 아닌 최선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우말라가 자신을 향한 의혹을 떨쳐내고 민주적인 체제하에서 소위 ‘인간의 얼굴을 한 발전’을 이룰 수 있기 위해, 아니 적어도 그럴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주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대선을 앞둔 1-2년간의 지지율 추이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0년부터 페루의 여론조사기관 Ipsos Apoyo가 실시한 유권자 선호도 조사에 의하면 우말라의 경우 대선 1차전이 있기 불과 한달 전까지도 15퍼센트 이하의 지지율을 보였던 반면, 전체 응답자의 70퍼센트 가량이 대선 1차에 출마했던 게이코, 톨레도(페루 전 대통령), 카스타녜다(수도 리마의 전 시장) 등 보수 진영 후보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후 1차 선거가 시작되기 한달 사이에 톨레도와 카스타녜다의 지지율이 또 다른 보수파 후보 쿠친스키(페루 전 총리)에게 분산되는 반면, 우말라의 지지율은 꾸준히 증가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말라가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유권자의 절대 다수가 보수 진영의 후보들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진영의 표들이 분산되면서 우말라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말라의 당선이 그의 강력한 지도력이나 카리스마에 근거하기 보다는 보수 진영의 전략이 실패함에 따른 결과였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금번 선거에서는 보수 진영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조건들이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인 연합에 이르지 못하면서 후지모리의 망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이코가 보수 진영을 대변하게 되었고, 결국 유권자들은 후지모리의 독재라는 기억과 타협하면서까지 보수 진영의 트레이드 마크인 체제 안정과 경제 성장을 택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예측 불가능하지만 고집은 한 풀 꺾인 듯한 우말라를 선택해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길들일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우말라가 마침내 페루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의 이러한 정황들을 살펴본다면, 우말라의 당선을 페루 좌파의 승리로 간주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더 나아가서 우말라의 취약한 지지기반을 고려한다면 우말라가 차베스의 선례를 따를 것인가라는 질문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설령 어부지리로 승리를 거둔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말라의 대선 승리를 통해 페루 사회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희망을 걸어볼 여지는 있다. 먼저 금번의 페루 대선은 외국 자본에 의한 광물자원 개발로 얻어진 가파른 경제 성장 모델의 문제점을 페루 국민들이 절실히 인식하고 있음을 반영하며, 부의 분배와 재투자 없는 붐 경제는 더 이상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민주적 절차와 체제를 파괴하는 후지모리식 독재에 대해서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말라가 공언하는 페루화된 룰라식 모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체제적인 안정과 사회적 포용을 통한 경제 성장이라는 원칙 역시 그 실현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페루의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인간적 자본주의에 대해 손을 들어 주었으며, 이제는 우말라가 변화하고 성장할 차례이다. 우말라의 신정부 출범이 페루가 라틴아메리카의 대안적인 성장 모델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11.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