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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중_20100318_지진과 쓰나미가 울린 사회적 경보

2011-03-02l 조회수 2570

리히터 규모 8.8의 지진이 칠레를 강타한 2시간 뒤인 5시 20분에 칠레 해군은 미첼레 바첼레트 대통령에게 진앙이 지하에 있기 때문에 쓰나미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10분 뒤에 3시 55분에 발령되었던 쓰나미 경보는 해제되었다. 그러나 경보가 해제된 그 시간쯤에 거대한 파도가 칠레 남부 해안을 덮쳤고, 800명 이상의 사망자 가운데 절반이 쓰나미에 의해 희생되었다. 강력한 지진과 연이어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서 전기와 수도 공급이 끊겼고 도로는 유실되었으며 주요 공항들이 폐쇄되었다. 지진의 직격탄을 맞은 인구 25만의 칠레 제2의 도시 콘셉시온(Concepci?n)과 이웃 도시인 딸까우아노(Talcahuano, 인구 20만)와 딸까(Talca, 인구 20만)의 상점과 약국은 전기가 끊기면서 일제히 문을 닫았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도 산티아고로부터 500㎞ 떨어진 콘셉시온에 구호품이 도착한 것은 나흘이 지난 뒤였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지진은 2월 27일(토요일) 새벽에 발생했고 구호품이 도착한 것은 3월 2일과 3일 사이였다. 유사한 자연 재난의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호품은 맨 처음 도시 중심 지역에 전달되었고 외곽 지역에는 이 보다 훨씬 뒤에 도착했다. 20m에 이르는 해일이 덮친 해안 지역의 주민들에게 구호품이 도착하기까지에는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 주민들은 계속되는 여진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물도 식량도 없이 노천에서 지내야했다.
1960년에 20세기 들어와 가장 강력한 지진(리히터 규모 9.5)이 발생했던 칠레를 50년 만에 다시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의 여파는 평상시에는 감춰져 있던 칠레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절망에 빠진 피해 지역에서 약탈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중앙 정부는 만 명 이상의 군대를 현장에 파견했다. 세 개 도시에는 오후 6시부터 정오까지 18시간 동안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현장을 취재한 연합통신(IPS)의 기자는 도시의 치안을 통제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시절의 계엄군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에 따르면 상점을 약탈한 사람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절망한 여자들과 남자들이었다. 우파는 약탈자들을 단호하게 다스릴 것을 요구했고 일간지 <<라 떼스세라(La Tercera)>>는 1906년 발빠라이소(Valpara?so) 지진 때 약탈자들 공개 처형했던 해군부사령관 루이스 고메스 까레뇨(Luis G?mez Carre?o)를 추모하는 글을 게재했다.
존경받는 칠레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인 가브리엘 살라사르(Gabriel Salazar)는 약탈은 정치적 무질서, 내란, 노동 파업 시기에도 발생했지만 이번의 약탈은 과거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극렬하며, 도전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사회적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통로가 막혀버린 채 오랫동안 잠복되어 있던 좌절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체포된 약탈자의 대부분은 가난한 젊은이들로, 그들은 마뿌체 원주민 학살에 동원되었고, 그 다음에는 천민들과 부랑자들을 탄압하는데 동원되었던 군대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960년 지진을 경험했던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은 칠레가 1960년과 비교해 국민소득이 15배 이상 증가하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자 나라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지만, 그 결과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칠레는 가장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되었으며, 시민들은 보편적인 사회정의 대신에 무절제한 소비에 빠진 나머지 스트레스와 정신적 피폐를 겪고 있다. 이 때문에 1960년 지진 때 보여주었던 광범위한 연대감이 이번 지진에서는 아주 희박해졌다는 것이다.
역사학자인 마리오 가르세스(Mario Garc?s)는 다른 시각에서 이번 대지진을 바라본다. 그는 이번의 지진에서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한 것은 정부의 대처 능력이 아니라 항상 지진을 경험하며 생활하는 칠레 주민들의 일상적 경험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정보화 시대가 될수록 통신시설이 무력화되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에 행정을 포함한 모든 서비스 설비가 분산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적인 통신방식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집중화되는 상황에서 자연재난이 주는 교훈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는 식료품과 약품의 공급이 중단된 것은 몇몇 기업이 대규모 상점과 약국의 공급을 장악함으로써 지역의 소규모 거래 공급선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이런 소수 독점 체계는 이번 지진으로 통신과 전기 공급이 끊기고 도로가 파괴되면서 맥없이 무력화되었다. 하루 혹은 이틀 치의 식품만을 구매해서 생활하는 빈곤층 주민에게 구호품이 도착하지 않았던 나흘 동안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마리오 가르세스가 강조하는 것은 구호품을 기다렸던 나흘 동안 가난한 주민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가 가져온 칠레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 폭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진은 천재지변이지만 지진의 피해는 빈부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미국의 권위 있는 정치평론사이트 <살롱닷컴>에 게재된 “시카고 보이스와 칠레 지진”(The Chicago boys and the Chilean earthquake)이라는 칼럼은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성공 사례로 꼽힌 칠레의 경제가 1970년대 초에 비해 확실하게 앞서나가게 된 것은 강경한 시장주의 정책들이 뚜렷하게 완화된 1980년대 말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경제적 불평등만을 촉발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전통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결과 위기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법과 가능성도 소멸되었다.
지난 1월의 아이티 지진은 말할 것도 없고, 2005년 8월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가져온 홍수처럼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재난의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목격한 것은 정부 기관, 다양한 사회적 서비스, 민간 기업이 한동안 마비되었다는 사실이다. 중앙 통제가 사라진 상황에서도 크고 작은 공동체적 유대를 통해 기능하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시장경제에 의해 소멸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은 지역 전체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군대를 보내는 것이다. 이것을 ‘재난의 군사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이티 지진에 비해 800~1,000배가 강했던 지진에 대처하는 칠레의 자세를 아이티와 비교하여 훌륭했다고 보도하는 언론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지진 취약 지역인 칠레에서 피해가 줄어든 것은 정부의 건축 규정 강화에 따른 방재건축의 승리라는 찬사도 부자에게만 성립되는 말이며, 부실 공사에 의해 파괴된 도로와 건물, 그리고 공항은 이러한 찬사의 이면을 보여준다. 가브리엘 살라사르가 경고하는 것처럼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은 가까운 미래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은 재난에 대한 대비와 더불어 재난의 군사화 대신에 새로운 사회적 유대감을 복구하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