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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낙태 합법화 논쟁과 가톨릭교회의 저항

2011-03-03l 조회수 3258

라틴아메리카 낙태 합법화 논쟁과 가톨릭교회의 저항

조영현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해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4백만 건의 낙태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쿠바의 ‘여성뉴스서비스’에 따르면 그 수치는 6백만 까지 상승한다. 천 명당 한 명의 여성이 비위생적 환경과 비전문가에 의해 낙태시술을 받다가 숨진다. 그리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 시술을 받은 수많은 여성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특히 이 지역 대다수의 국가들은 가난한 나라들로 분류된다. 따라서 미혼모처럼 아이를 키울 수 없거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낙태를 선택하는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현재 낙태를 극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허용하는 나라는 파라과이,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페루, 코스타리카 등 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임신을 지속시킴으로 산모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앞의 경우 외에도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에콰도르, 파나마 등은 성폭행에 의한 임신도 낙태를 허용한다. 그러나 멕시코에서는 지방자치의 원리에 따라 각 주는 다른 법이 적용되기도 한다. 최근 멕시코시 의회는 더 완화된 낙태법의 적용을 승인했다. 이 도시에서는 임신 12주 이전에 임산부의 결정에 따라 낙태가 합법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칠레,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는 원천적으로 낙태가 불가능하다. 이들 나라들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낙태법을 적용하는 나라들이다. 임산부의 생명이 위협받는 경우에도 낙태가 불가능하다.
반대로 사회주의권인 쿠바,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푸에르토리코, 프랑스령 기아나 등은 낙태가 자유로운 국가에 속한다. 쿠바는 1965년부터 낙태자유화가 법으로 제정되었다. 임산부는 12주 이전에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에 따라 낙태를 할 수 있고, 12주가 지난 후에도 임산부 자신의 의지만 확고하면 낙태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 전체적으로 낙태는 불법화 되어 있는 실정이고 일부 극히 협소한 범위 내에서 제한 적으로 허용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민정서상 낙태는 비도덕한 행위이며, 범죄라고 생각된다.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낙태문제는 라틴아메리카 각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공통점은 다른 지역 국가들에 비해 낙태문제를 공론화 한다는 것 자체를 터부시한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지역이라, 가톨릭적 가치관, 사고방식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가톨릭 교리에 근거해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에서 낙태문제가 주요 쟁점 문제로 부상하며 가톨릭의 권위에 타격을 주고 있다.

먼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가톨릭 신도를 보유한 브라질에서 2010년 대선기간 중 낙태문제가 정치쟁점화 되었다. 낙태 허용 발언을 한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62) 후보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에 실패했다. 선거 분석가들에 따르면 1차 투표에서 50%를 획득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낙태에 대한 그녀의 입장 때문이었다. 선거 초반 많은 수의 가톨릭 신도들은 호세프를 지지했으나 그녀가 낙태를 허용하겠다는 공약을 하자 이 공약 하나 때문에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가톨릭교회 지도자들도 “죽음의 후보자”라고 그녀를 비난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브라질 사제들에게 가톨릭교회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낙태 반대 입장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룰라 대통령의 지지와 지원으로 쉽게 관반 득표에 성공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결선투표를 치러야 했다.

1차 선거가 끝난 후 결선을 기다리던 동안 호세프 후보는 한 TV와의 인터뷰에서 “한 해 350만 명이 낙태를 하는 현실까지 속일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낙태를 반대하지만 낙태를 한 여성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선 투표를 며칠 앞두고 결국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종교단체의 압력에 굴복했다. 임신을 지속시킬 때 산모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경우나 강간에 의한 임신에만 낙태가 허용되는 현 법률을 유지하고 법을 개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교회 측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자당이 낙태를 지지하는 정당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입법부에서 낙태법을 수정하고자 한다면 브라질에서 이 문제는 다시 정치 쟁점화 될 가능성이 높다.

볼리비아 현행 형법은 임산부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 성폭행, 근친성교 등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비정부기구(NGO), 여성운동단체, 그 밖에 낙태를 지지하는 사회단체들이 의회에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에 대해 보수 야당과 가톨릭교회, 반낙태시민단체 등은 강력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최근 동성결혼 허용법을 공포한 아르헨티나도 낙태 허용 문제까지 제기되면서 이 문제가 전국적으로 쟁점화할 양상을 보이고 있다. 논쟁의 최초 진원지는 사법부였다. 한 대법원 판사는 다른 구미 선진국처럼 “낙태 허용을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여성단체들은 낙태를 불법화함으로서 파생되는 임산부의 죽음, 후유증, 외국으로 낙태시술 원정, 고비용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이에 호응했다.

낙태 허용 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교회이다. 가톨릭교회는 낙태를 생명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행위로 판단한다. 인간 생명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된다고 믿는다. 낙태문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는 별개의 사항으로 여긴다. 불가피한 경우, 즉, 임산부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성폭행, 기형 때문에 낙태를 허용하는 경우도 할 수 없이 처벌을 면해준다는 것이지 생명을 제거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비인간적이고, 후유증이 심각한 낙태를 권장할 것이 아니라 임산부가 안전하게 생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사회제도와 의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톨릭의 이러한 생명 존중 사상, 혹은 완고한 입장과 다양한 이유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의 현실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낙태 합법화 논쟁이 제기된 배경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다. 2000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전 대륙 차원에서 불어 닥친, ‘좌파 휘몰이’, ‘좌파 도미노’ 혹은 ‘분홍물결’이란 표현이 말해주듯 좌파 정당이 정권을 장악했고, 진보노선의 대통령들이 취임했다. 진보정당들은 진보적인 이념을 정책에 반영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낙태문제를 건드리게 되었다. 특히 서구의 영향으로 발전한 여성운동단체들의 목소리와 국제기구의 권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여러 정황과 맞물려 낙태논쟁은 다른 주변국들로 점차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10.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