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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 인권의 대변자 사무엘 루이스 주교

2011-03-03l 조회수 4213

인디오 인권의 대변자 사무엘 루이스 주교

조영현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사무엘 루이스 주교는 원주민들 사이에 타틱(Tatic, 마야어로 아버지라는 애칭과 존경의 표현)이라고 불린다. 그 밖에도 ‘인권의 수호자’, ‘가난한 자들의 대변인’, ‘제 2의 라스 까사스 주교’, ‘해방신학 주교’, ‘빨갱이 주교’, ‘좌파 주교’, ‘반란의 아이콘’ 등 그에 대한 수식어와 평가는 너무나 다양하다. 따라서 그를 활동을 이해하지 않고는 최근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에서 부상하고 있는 정치ㆍ사회운동의 핵심 세력인 원주민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2011년 1월 24일 향년 86세로 별세한 루이스 주교의 선종 소식은 멕시코 전역에서 애도의 물결을 일으켰다. 펠리페 칼데론(Felipe Calder?n) 대통령이 공식 행사장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묵념을 제안했으며, 사파티스타 부사령관인 마르코스(Subcomandante Marcos)도 통신문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의인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표하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마르코스는 루이스 주교가 단지 치아파스 원주민들이 가난의 문제나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이주문제를 염려한 것만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삶의 상태, 즉 불의를 개선하기 위해 투쟁했다고 기억했다. 수백 년 동안 방치되었던 인디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한 사회 투쟁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루이스 주교가 1994년 사파티스타 봉기 이전부터 다양한 세력들로부터 위협과 괴롭힘, 압력을 받았다고 성명서를 통해 밝혔다. 마르코스는 그의 죽음이 남은 자들에게 허무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찬 내일을 약속하고 있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돈 사무엘 주교는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뜻을 따르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남아있다. 남은 자들은 신앙 때문에 더 민주적이고, 더 자유롭고, 더 정의로운 세상, 즉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한다. 그런 남, 여에게 경의를 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기에 내일은 다시 밝아올 것이다.” 

교회 내에서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발표들이 잇달았다. 바티칸 라디오는 루이스 주교가 2002년 유네스코가 수여한 국제인권상을 수상했다고 상기시켰다. 게다가 멕시코 정부와 사파티스타 사이의 분쟁을 중재해 평화 정착에 기여한 주교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1994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것은 그런 노력의 결실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회 방송은 인권수호센터를 설립해 가난한 약자들을 대변했던 루이스 주교가 16세기에 인디오 인권을 대변하던 라스 까사스 주교 이후 멕시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에 발을 딛기 전까지 전형적인 보수 성직자와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루이스 주교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인디오들의 가난과 죽음을 목도하고 진보 노선의 주교로 탈바꿈했다. 그는 치아파스 최초의 주교이자 ‘인디오 인권의 아버지’로 불렸던 라스 까사스 주교가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에서 묘사한 모습이 450년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에 충격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거부당한 채 살아가는 인디오의 모습 속에서 정치ㆍ경제적 희생자로서 원주민을 보았다. 루이스 주교는 대지주들에게 토지를 빼앗긴 원주민 농민들을 대변했고, 내전을 피해 멕시코 국경을 넘은 수만 명의 과테말라 인디오들에게도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의 사목 노선을 보면 인디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잘 드러난다.『어떻게 내가 인디오가 되었나』라는 자서전적 글에서 복음을 전하러 치아파스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원주민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복음화 되었다고 고백했다.

루이스 주교는 모든 인디오들에게 스페인어를 배우라고 강요하는 것 보다 복음을 전하는 교구의 사제들에게 인디오 언어를 배우도록 촉구했다. 그것이 선교에 더 효과적일 뿐 아니라 원주민에 대한 도리라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복음은 인디오 고유 언어로 선포될 때 참된 행복을 주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의 구호를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실천했기에 주교직을 수행하는 내내 치아파스의 권력층과 대지주들에게 반감을 샀고 그들의 고발과 모함을 견뎌야 했다. 정치가, 주지사, 지방 토호들은 주교가 교회를 분열시키고 정치에 개입한다고 항의했고, 바티칸에 그의 해임을 탄원했다. 특히 주교가 가만히 있는 원주민들에게 좌파 이념을 이식시켰고, 결국 사파티스타들이 봉기하게끔 사주했다고 모함했다. 치아파스의 전통적 권력층은 마르크스주의에 영감을 받아 해방신학이 탄생했고, 이 신학 노선의 사목 정책을 루이스 주교가 적용했기 때문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이 지역에 등장했다고 주교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치아파스에서 원주민 운동이나 무장 게릴라 투쟁이 발생한 것은 무엇보다 인디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와 가난, 불의 등 인권유린의 현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이스 주교를 가장 괴롭힌 것은 외부에서의 비난과 모함보다 교회 내의 분열과 바티칸과의 갈등이었다. 그가 이룩하고자 한 ‘토착화 된 교회’ 프로젝트는 그가 은퇴한 후 바티칸에 의해 중단되었다. 신도 수에 비해 사제들이 부족한 치아파스 현실에서 사제를 대신해 세례, 혼인 등 다양한 성사(聖事)를 도와줄 원주민 종신부제의 서품을 중단시킨 것은 그에게 커다란 타격이었다. 바티칸이 염려한 문제는 결혼한 원주민들의 부제서품은 교회가 유지하는 독신문제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란 점 때문이었다. 루이스 주교는 신앙과 생활에서 모범이 되는 나이든 원로들을 주로 선별해 교회 사업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바티칸이 서품 중단 지침을 내리기 전인 2000년 6월까지 치아파스에서는 총 800명의 종신부제가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단 명령이 내려지자 원주민 언어와 문화에 뿌리박은 교회 내 토착화 작업은 그 주된 동력을 상실했다.

그는 1994년 사파티스타들이 무기를 들고 봉기했을 때도 그것이 내전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다방면에서 열세인 원주민들이 정부군에 의해 처참히 진압되는 불행한 상황을 막고자 했다. 루이스 주교는 그들이 평화적 사회운동 노선을 걷기를 희망했지만 봉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주민과 사파티스타의 결정도 존중했다. 따라서 그들의 봉기를 단죄하지도 방해하지도 않았다. 멕시코에 만연한 불의와 복면을 쓸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1994년 정부와 게릴라 간 대화에 참여했던 전직 제도혁명당(PRI) 사무총장 까마초 솔리스(Camacho Solis)는 루이스 주교의 두 가지 업적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첫째로 주교가 자신의 권리를 모르던 원주민들에게 농지법과 헌법에 기초해 원주민들의 권리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의식화 시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의식화를 통해 치아파스의 가난한 원주민들은 스스로 자신이 역사의 주체이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주교의 지원과 협력으로 국가로부터 소외된 원주민 문제가 멕시코 국내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대륙 내의 주된 의제가 될 수 있었다. 루이스 주교는 “치아파스처럼 끊임없이 인권이 유린되는 곳은 정의가 없는 곳이며 그런 곳에는 평화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가 의제화한 문제는 한마디로 인권과 정의라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였다. 둘째로 사파티스타 봉기로 멕시코가 전쟁의 위험에 빠졌을 때 전쟁을 피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당시에는 적의에 찬 원주민들이 이미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정부와 게릴라 간 신뢰나, 소통, 대화의 경험이 전무한  상태여서 서로의 입장이 극단을 달리고 있었다. 양측이 신뢰한 유일한 인물이 루이스 주교였다. 따라서 중재자로 나선 루이스 주교의 인격을 믿고 서로 대화와 협상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치아파스에서 루이스 주교를 보좌하다 살티요의 주교로 간 라울 베라(Ra?l Vera)는 루이스 주교가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을 드러냈으며, 예레미아 예언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장례식 조사에서 밝혔다. 무엇보다 순수한 가슴을 지닌 루이스 주교는 각각의 형제ㆍ자매 속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그를 칭송했다. 그는 루이스 주교의 사목 방침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 많이 아니라 이 땅에서 완성 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평생을 가장 가난한 원주민들과 함께 살며 그들과 동행했던 루이스 주교는 지금과는 달리 인디오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다른 세상’이 가능할 거란 믿음을 원주민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떠났다. 희망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그래서 통신문에서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그의 죽음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본다고 선언한 것이다. 오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헌신한 그의 삶과 죽음은 마약과의 전쟁으로 지치고 황폐해진 멕시코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이자 작은 위로가 되고 있다.
<2011.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