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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중_20100924_다시 민중의 심판 앞에 선 라틴아메리카

2011-03-03l 조회수 2927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은 2004년 보고서에서 “라틴아메리카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를 내린 대륙”이라고 적었다. 이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무력혁명을 통한 정권 장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군부 쿠데타 같은 반민주적 행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 권력은 선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이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활수준이 향상된다면 독재정권을 지지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놀랍게도 열 명 중 다섯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독재정권을 지지하겠다고 응답했다는 설문조사 내용도 보고서에 실려 있다. 보고서는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불평등하고 가난한 민주주의”로 규정했다. 그리고 ‘불만족스러운 민주주의’ 때문에 지금 라틴아메리카에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포퓰리즘 논쟁이 또 다시 토론의 주제로 등장했다. 빈곤과 불평등은 단지 사회문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민주주의가 단순히 선거민주주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민중민주주의로 이행하고 있는지를 심판받는 두 개의 중요한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나는 9월 28일에 치러지는 베네수엘라 총선이고, 다른 하나는 10월 3일에 치러질 브라질 대선이다. 베네수엘라와 브라질 선거는 향후 남미 전체의 정치지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이념적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만일 두 개의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패배한다면, 대륙 전체의 정치적 권력 균형이 급격히 좌에서 우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칠레에서 중도우파가 새롭게 정권을 잡았고 중미에서는 온두라스 쿠데타에 이어 코스타리카와 파나마에 미국의 군사적 간섭이 본격화되고 있다.
브라질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여론조사 기관들의 발표에 따르면 현 대통령 룰라 다 실바의 지지와 후광을 등에 업은 노동자당(PT) 후보인 딜마 호우세피(Dilma Rousseff)가 제1야당인 브라질 사민당(PSDB) 후보 주제 세하(Jos? Serra) 후보를 멀찌감치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미 정치지형의 전환을 희망하는 국제적인 보수 세력들은 전투력을 베네수엘라 선거에 집결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전투”라는 언론 보도처럼 베네수엘라 총선은 한 마디로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되었다.
하원 단원제 체제인 베네수엘라 의회는 현재 거의 100% 친(親)차베스 정당들이 차지하고 있다. 2002년과 2003년에 연이은 군사쿠데타, 자본파업, 국민소환투표를 통해 차베스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했던 반차베스 세력이 2005년에 실시된 총선을 보이콧했기 때문이다. 총선 보이콧이 커다란 실수였음을 깨달은 반차베스 세력들은 이번 선거에서 정치적 비전이나 노선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반차베스 연대를 내세워 집결하고 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무기가 의회 쿠데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의회 의석은 167석이며 그 중 3석은 원주민 대표에게 할당되어 있다. 164석 중 60%가 지역구에, 나머지 40%가 비례대표에 주어지며, 지역구 선거에서 50% 이상을 득표한 정당이 비례대표 의석의 75%를 차지한다. 베네수엘라 헌법은 기본법인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전체 의석의 ⅔의 찬성이 필요하고, 대통령령인 시행령(leyes habilitantes)을 발효하기 위해서는 전체 의석의 ?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반차베스 세력이 차베스 정권의 개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최소 56석에서 최대 67석의 의석이 필요한 상황이다.
반차베스 세력은 이렇다 할 정치적 비전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언론을 통한 차베스 흠집 내기를 선거 전략으로 삼고 있다. 언론에서 차베스를 수식하는 용어들은 “군복 입은 포퓰리스트”(barracks populist), “독재자”, “선동가”, “사이코패스” 등 다양하다. 때로는 편집증과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폭력배쯤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도 차베스가 지난 10년 동안 세계 어느 나라의 정치가보다 더 많은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 때문인지 “선출된 전제정치”(elected autocracy)나 “못돼먹은 민주주의”(rogue democracy) 같은 정치학 용어에도 없었던 형용모순적인 단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흠집 내기 언론 전략은 브라질도 마찬가지이다. 브라질 잡지 <에포카>(Epoca)는 딜마 호우세피 장관의 군부독재 정권 시절의 게릴라 투쟁 전력을 대서특필했다. 
반차베스 세력은 베네수엘라에 산적해 있는 현안―주거 부족, 범죄율의 상승, 식수 부족, 대규모 정전 사태 등―을 앞세워 정부의 무능력을 공격하고 차베스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차베스가 집권한 이후 10년 동안 사회적 투자가 그 이전 10년(1988~1998)에 비해 5배가 증가했고, 빈곤층은 1999년 49.4%에서 2006년 30.2%로, 극빈층은 21.7%에서 7.2%로 감소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베네수엘라의 발전을 가로 막는 두 가지 주된 장애물이 경제의 핵심 부문의 민영화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모른 체 하는 것이다.
브라질 대선과 베네수엘라 총선이 처해 있는 역사적·사회적·정치적 상황은 다르지만 지난 10년 동안 추진해온 역사적 단절을 공고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과거로 회귀할 것인지 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의 말은 라틴아메리카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반개혁 세력들은) 능수능란한 동맹을 통해 카드 패를 다양하게 나누었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반복해서 말한다: ‘민중들이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혁명을 하자’. 그들에게 혁명은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도록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배제되는 사람들이 더 적은, 더 근대적인 시대를 시작할 수 있는 역사적 권력 주체가 등장하는 것을 끊임없이 저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