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형_200909_노래로 살아있는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
내 그대를 사랑함은
내 사랑, 공모자, 그리고 모든 것이기 때문이네.
거리에서 어깨 걸면 우린 둘 이상이네.
이만큼 축복받은 시인이 있을까? 40명이 넘는 저명한 가수들이 오래 전부터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노벨상을 받은 파블로 네루다도 그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으리라. ‘그대를 사랑해(Te quiero)’는 이제 이베로아메리카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디바 나차 게바라(Nacha Guevara)가 이를 불러 유행을 시켰고, 고혹적인 목소리를 지닌 페루계 멕시코 가수 타니아 리베르타드(Tania Libertad)도 이를 히트곡으로 만들었다. 사랑가라고 한다면 쿠바 가수 파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es)의 ‘세월(Los anos)’과 이 노래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2009년 5월 17일 이베로아메리카 세계는 큰 슬픔에 빠졌다. 몬테비데오가 낳은 위대한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Mario Benedetti, 1920~2009)가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 것이다. 우루과이 정부는 바로 국장을 선포했고, 스페인어권 언론들은 제각기 시인을 추모하는 특집을 실었다. 80여 권의 시집, 소설, 극본 등을 남겼던 그는 “단편과 소설을 쓴 적이 있는 시인”으로 기억해주길 바랬다.
시인 베네데티는 나에게 우연히 다가왔다. 1987년 어느 때인가 멕시코 서점에서 나차 게바라의 노래 테이프를 하나 구했던 것이다. 1975년에 멕시코 실황 공연을 테이프로 만든 것이었다. ‘그대를 사랑해’는 폴 엘뤼아르의 시 ‘우리는 둘이서’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사무실의 시》에서 나온 ‘월급’, ‘나는 비서랍니다’, ‘신입사원을 위한 발라드’는 사무실의 애환이 담긴, 유머가 넘치는 시들이었다. ‘왜 웃나요?’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그의 시어는 쉬운 일상적 언어이지만 늘 촌철살인의 재치를 담고 있었다. 나차의 목소리도 매력적이었다. 바로 베네데티의 시선집도 하나 구했고, 테이프가 닳아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1998년에 타니아 리베르타드도 베네데티를 주제로 음반을 내었다. 《인생이란 이 괄호(La vida ese parentesis)》가 그것이다. 이 음반을 손에 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시인은 인생을 관조하는 노인의 시선으로 향수, 어린이, 마을, 소녀들을 노래한다. 타니아의 섬세하면서도 열정적인 목소리는 시인의 목소리와 합쳐서 하나가 된다. 깊은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밀려온다. 가톨릭 사회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하이쿠 풍의 시 구절 “파팜 하베무스(Papam habemus)”를 장중한 미사곡 형식의 반주에다 담아낸다. 교황청의 콘돔 금지를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꼰도나 라스 꼰데나스/ 꼰데나 로스 꼰도네스.” 바로크적 언어유희의 걸작이다.
Tutor de los perdones 죄를 용서하는 사감
distribuidor de penas고통의 배분자
condona las condenas 죄는 사면하지만
condena los condones콘돔은 금한다
우루과이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그의 정치적 동지였던 다니엘 비글리에티(Daniel Viglietti)도 오래전에 음반을 남겼고, 카탈루냐 출신의 음악인 호안 마누엘 세랏(Joan Manuel Serrat)도 《남쪽도 있다(El sur tambien existe)》란 음반으로 대시인의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오랫동안 죽음을 기다렸는지, 유언장에 해당하는 하이쿠 풍의 시에도 유머가 물씬 묻어있다. “날 묻을 때/ 제발 잊지 말게나/ 내 볼펜을.” 시인은 볼펜과 함께 묻혔지만, 그의 시들은 노래로, 음반으로, 유튜브(YouTube)로 전 세계를 유랑한다.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는 1920년 9월 14일에 우루과이의 타쿠아렘보 주의 파소델로스토로스에서 태어났다. 출생신고 시에 등록된 이름은 Mario Orlando Hamlet Hardy Brenno Benedetti였다. 당시 이탈리아 이민들의 황당한 풍습은 이름을 길게 짓는 것이었다. 그의 삼촌 하나는 태어날 때 통치를 하던 모든 군주의 이름을 몽땅 넣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가 최초로 벌인 투쟁은 이름 네 개를 서류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약제사였던 부친이 하던 약방이 파산을 하자 가족은 모두 몬테비데오로 이사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늘 경제적 궁핍 속에서 살았다. 가족은 시 근교에 있는 빈민가의 양철지붕 아래 살았다. 초등학교는 독일계 학교를 다녔는데, 그래서 그는 독일어를 모국어 다음으로 친근하게 생각한다. 그가 쓴 최초의 시도 독일어 시였다. 초등학생이 썼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선생은 마리오의 아버지가 쓴 보증서를 보고서야 아이의 시재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격한 독일계 학교의 훈육 탓인지 그는 규율, 정확성, 엄격함의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중학생 정도의 나이인 14세에 그는 윌 스미스 사의 자동차 부품 판매상을 시작하면서, 청소년 시절부터 온갖 직업의 세계를 섭렵했다. 노점상, 출판사 타자수, 직업군인, 사무직원, 번역가, 부동산 관리인, 신문기자, 교수 등이 그가 거친 일자리였다. 이런 이력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하층 사회를 이해하게 되었고 정치화되었으며, 이들의 일상 언어를 자연스럽게 시나 수필로 담아낼 수 있었다.
18세가 되던 1938년, 돈을 벌려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그는 산마르틴 광장의 벤치에서 글쓰기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문인으로서 출발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 처음에 자비로 출판한 두 권의 시집은 한 권도 팔지 못했다. 1956년에 나온 일곱 번째 시집인《사무실의 시》가 조그만 성공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1945년부터 몬테비데오의 대표적인 주간지《마르차》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시, 평론, 단편을 활발하게 발표한다. 1974년 군정이 이 잡지를 폐간 조치할 때까지《마르차》는 그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혁명 이후 쿠바를 여행하면서 그는 정치의식에 큰 충격을 느꼈다.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1968년에 카사 델 라스 아메리카스에 문학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71년까지 소장으로 봉직하였다. 조국에 돌아온 그는 당시 카스트로주의 세력이었던 투파마로스 민족해방전선(LNT)과 함께 ‘3월26일 독립운동’이란 정치조직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다(이 조직은 2005년 이후 집권여당 연합인 확대전선[Frente Amplio]의 일부이다). 하지만 정치적 양극화는 곧 쿠데타와 군정의 수립으로 귀결된다. 그는 1973년 6월 봉직하던 라레푸블리카 대학의 인문대 이스파노아메리카 문학과장 자리를 버리고, 오랜 망명의 길에 나선다.
유랑의 길은 험했고 기약도 없었다. 처음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그곳에서는 극우단체인 AAA가 “48 시간 이내에 출국할 것”을 요구하며 생명을 위협했다. 그래서 페루로 갔다. 하지만 리마에서는 구금을 당한 채 추방을 당했다. 국가테러리즘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홍역처럼 번져 나갔다. 겨우 1976년에 가서야 쿠바가 그에게 손을 벌렸다. 베네데티는 1년 뒤에 망명의 종착지로 스페인을 택했고, 그곳에서 1983년까지 지냈다. 결국 10년을 외국에서 부인도 없이 지낸 것이다. 망명 시절에 더러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 1974년에 그의 소설 《정전(La tregua)》가 세르히오 레난 감독의 손을 통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칸느 영화제에서 최고의 외국영화 부문에 추천되기도 했다.
그의 정치노선이나 신념은 완고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것은 그가 타고난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가 신봉하는 대의가 패배했다고 해도 나는 다시 일어난다. 대의를 위해 싸우는 덕분에 나는 편히 잠을 잘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관한 한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신념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 성공을 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그의 발은 대지에 굳건히 닿아 있지만, 유토피아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강렬하다. “나는 항상 말했다. 세상이 낸 세 명의 위대한 유토피아주의자는 예수, 프로이트 그리고 맑스라고. 그들 덕분에 인간성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들의 유토피아가 10% 정도 진척되었다고 해도, 그 10%로 인해 인간성은 조금씩 개선되어 간다. 나는 교정이 불가능한 낙관주의자이다.”
그의 시에는 늘 사람들의 풋풋한 냄새가 난다. “내 시의 많은 것은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의 산물이다. 민중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항상 나의 최고덕목이었다. 내 인생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쓴 글이 이 서민, 민중, 두 발로 서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사랑, 공모자, 그리고 모든 것이기 때문이네.
거리에서 어깨 걸면 우린 둘 이상이네.
이만큼 축복받은 시인이 있을까? 40명이 넘는 저명한 가수들이 오래 전부터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노벨상을 받은 파블로 네루다도 그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으리라. ‘그대를 사랑해(Te quiero)’는 이제 이베로아메리카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디바 나차 게바라(Nacha Guevara)가 이를 불러 유행을 시켰고, 고혹적인 목소리를 지닌 페루계 멕시코 가수 타니아 리베르타드(Tania Libertad)도 이를 히트곡으로 만들었다. 사랑가라고 한다면 쿠바 가수 파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es)의 ‘세월(Los anos)’과 이 노래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2009년 5월 17일 이베로아메리카 세계는 큰 슬픔에 빠졌다. 몬테비데오가 낳은 위대한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Mario Benedetti, 1920~2009)가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 것이다. 우루과이 정부는 바로 국장을 선포했고, 스페인어권 언론들은 제각기 시인을 추모하는 특집을 실었다. 80여 권의 시집, 소설, 극본 등을 남겼던 그는 “단편과 소설을 쓴 적이 있는 시인”으로 기억해주길 바랬다.
시인 베네데티는 나에게 우연히 다가왔다. 1987년 어느 때인가 멕시코 서점에서 나차 게바라의 노래 테이프를 하나 구했던 것이다. 1975년에 멕시코 실황 공연을 테이프로 만든 것이었다. ‘그대를 사랑해’는 폴 엘뤼아르의 시 ‘우리는 둘이서’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사무실의 시》에서 나온 ‘월급’, ‘나는 비서랍니다’, ‘신입사원을 위한 발라드’는 사무실의 애환이 담긴, 유머가 넘치는 시들이었다. ‘왜 웃나요?’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그의 시어는 쉬운 일상적 언어이지만 늘 촌철살인의 재치를 담고 있었다. 나차의 목소리도 매력적이었다. 바로 베네데티의 시선집도 하나 구했고, 테이프가 닳아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1998년에 타니아 리베르타드도 베네데티를 주제로 음반을 내었다. 《인생이란 이 괄호(La vida ese parentesis)》가 그것이다. 이 음반을 손에 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시인은 인생을 관조하는 노인의 시선으로 향수, 어린이, 마을, 소녀들을 노래한다. 타니아의 섬세하면서도 열정적인 목소리는 시인의 목소리와 합쳐서 하나가 된다. 깊은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밀려온다. 가톨릭 사회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하이쿠 풍의 시 구절 “파팜 하베무스(Papam habemus)”를 장중한 미사곡 형식의 반주에다 담아낸다. 교황청의 콘돔 금지를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꼰도나 라스 꼰데나스/ 꼰데나 로스 꼰도네스.” 바로크적 언어유희의 걸작이다.
Tutor de los perdones 죄를 용서하는 사감
distribuidor de penas고통의 배분자
condona las condenas 죄는 사면하지만
condena los condones콘돔은 금한다
우루과이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그의 정치적 동지였던 다니엘 비글리에티(Daniel Viglietti)도 오래전에 음반을 남겼고, 카탈루냐 출신의 음악인 호안 마누엘 세랏(Joan Manuel Serrat)도 《남쪽도 있다(El sur tambien existe)》란 음반으로 대시인의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오랫동안 죽음을 기다렸는지, 유언장에 해당하는 하이쿠 풍의 시에도 유머가 물씬 묻어있다. “날 묻을 때/ 제발 잊지 말게나/ 내 볼펜을.” 시인은 볼펜과 함께 묻혔지만, 그의 시들은 노래로, 음반으로, 유튜브(YouTube)로 전 세계를 유랑한다.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는 1920년 9월 14일에 우루과이의 타쿠아렘보 주의 파소델로스토로스에서 태어났다. 출생신고 시에 등록된 이름은 Mario Orlando Hamlet Hardy Brenno Benedetti였다. 당시 이탈리아 이민들의 황당한 풍습은 이름을 길게 짓는 것이었다. 그의 삼촌 하나는 태어날 때 통치를 하던 모든 군주의 이름을 몽땅 넣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가 최초로 벌인 투쟁은 이름 네 개를 서류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약제사였던 부친이 하던 약방이 파산을 하자 가족은 모두 몬테비데오로 이사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늘 경제적 궁핍 속에서 살았다. 가족은 시 근교에 있는 빈민가의 양철지붕 아래 살았다. 초등학교는 독일계 학교를 다녔는데, 그래서 그는 독일어를 모국어 다음으로 친근하게 생각한다. 그가 쓴 최초의 시도 독일어 시였다. 초등학생이 썼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선생은 마리오의 아버지가 쓴 보증서를 보고서야 아이의 시재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격한 독일계 학교의 훈육 탓인지 그는 규율, 정확성, 엄격함의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중학생 정도의 나이인 14세에 그는 윌 스미스 사의 자동차 부품 판매상을 시작하면서, 청소년 시절부터 온갖 직업의 세계를 섭렵했다. 노점상, 출판사 타자수, 직업군인, 사무직원, 번역가, 부동산 관리인, 신문기자, 교수 등이 그가 거친 일자리였다. 이런 이력 때문에 그는 일찌감치 하층 사회를 이해하게 되었고 정치화되었으며, 이들의 일상 언어를 자연스럽게 시나 수필로 담아낼 수 있었다.
18세가 되던 1938년, 돈을 벌려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 그는 산마르틴 광장의 벤치에서 글쓰기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문인으로서 출발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 처음에 자비로 출판한 두 권의 시집은 한 권도 팔지 못했다. 1956년에 나온 일곱 번째 시집인《사무실의 시》가 조그만 성공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1945년부터 몬테비데오의 대표적인 주간지《마르차》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그는 시, 평론, 단편을 활발하게 발표한다. 1974년 군정이 이 잡지를 폐간 조치할 때까지《마르차》는 그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혁명 이후 쿠바를 여행하면서 그는 정치의식에 큰 충격을 느꼈다.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1968년에 카사 델 라스 아메리카스에 문학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71년까지 소장으로 봉직하였다. 조국에 돌아온 그는 당시 카스트로주의 세력이었던 투파마로스 민족해방전선(LNT)과 함께 ‘3월26일 독립운동’이란 정치조직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다(이 조직은 2005년 이후 집권여당 연합인 확대전선[Frente Amplio]의 일부이다). 하지만 정치적 양극화는 곧 쿠데타와 군정의 수립으로 귀결된다. 그는 1973년 6월 봉직하던 라레푸블리카 대학의 인문대 이스파노아메리카 문학과장 자리를 버리고, 오랜 망명의 길에 나선다.
유랑의 길은 험했고 기약도 없었다. 처음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그곳에서는 극우단체인 AAA가 “48 시간 이내에 출국할 것”을 요구하며 생명을 위협했다. 그래서 페루로 갔다. 하지만 리마에서는 구금을 당한 채 추방을 당했다. 국가테러리즘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홍역처럼 번져 나갔다. 겨우 1976년에 가서야 쿠바가 그에게 손을 벌렸다. 베네데티는 1년 뒤에 망명의 종착지로 스페인을 택했고, 그곳에서 1983년까지 지냈다. 결국 10년을 외국에서 부인도 없이 지낸 것이다. 망명 시절에 더러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 1974년에 그의 소설 《정전(La tregua)》가 세르히오 레난 감독의 손을 통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칸느 영화제에서 최고의 외국영화 부문에 추천되기도 했다.
그의 정치노선이나 신념은 완고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그것은 그가 타고난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가 신봉하는 대의가 패배했다고 해도 나는 다시 일어난다. 대의를 위해 싸우는 덕분에 나는 편히 잠을 잘 수 있다.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관한 한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신념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다. 성공을 하지 못하더라도 좋다!”
그의 발은 대지에 굳건히 닿아 있지만, 유토피아를 향한 시선은 여전히 강렬하다. “나는 항상 말했다. 세상이 낸 세 명의 위대한 유토피아주의자는 예수, 프로이트 그리고 맑스라고. 그들 덕분에 인간성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들의 유토피아가 10% 정도 진척되었다고 해도, 그 10%로 인해 인간성은 조금씩 개선되어 간다. 나는 교정이 불가능한 낙관주의자이다.”
그의 시에는 늘 사람들의 풋풋한 냄새가 난다. “내 시의 많은 것은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의 산물이다. 민중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항상 나의 최고덕목이었다. 내 인생에서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쓴 글이 이 서민, 민중, 두 발로 서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