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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생환 광부들 '현실, 해피엔딩 아니네'

2011-08-05l 조회수 2682

미국 디즈니랜드를 방문한 칠레 광부들(AP=연합뉴스 자료사진)

(산티아고=연합뉴스) 김태균 특파원 = 지난해 8월5일 칠레 북부의 산호세(San Jose) 구리 광산이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지하 700m에 갇힌 광부 33명은 똘똘 뭉쳐 69일을 버텼다. 이들의 구출 작전은 전 세계 시청자 10억 명을 열광시켰다. 광부들은 구조된 후 양복 차림에 칠레 국기를 들고 국내외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사고 발생 1주년이 다가오는 지금 이들이 접하는 현실은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다.

  광산 재취업이 번번이 좌절된데다 우울증과 악몽 등 후유증이 잇따랐다. '명성과 돈에 도취됐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구출 작전을 벌인 칠레 정부와의 불화도 잦아들 기미가 없다.

   많은 칠레인은 "논란이 많은 사안이라 광부들을 국민적 영웅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 취업난에 법정 공방까지 = 영국 텔레그래프지와 스페인 EFE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구출된 광부 33인 중 18명은 광산 복귀를 희망하고 있으나 아직 실업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고용했던 광산주는 빚더미에 파산을 신청했고, 다른 광산에 취업해도 이유 없는 공포감과 환청 같은 증상이 발목을 잡았다.

   육체적 후유증도 크다. 3명은 실리콘 먼지가 폐를 망가뜨리는 불치병인 '규폐증(硅肺症)' 진단을 받았고 다른 11명도 건강상 문제로 더 일을 할 수 없다며 은퇴 신청을 냈다.

   출판권과 TV출연료로 거금을 챙겼다는 추측에 광부들은 손사래를 친다. 실제 받은 거금은 한 광산 재벌이 1인당 준 위로금 500만 칠레 페소(한화 1천200여만원)가 전부였고 다른 배상금은 지금껏 소식이 없다는 것.

   국제적 명사가 되며 씀씀이가 커졌지만 오히려 고정적인 수입이 끊긴 탓에 돈 문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광부들은 하소연한다.

   이들의 구출 작전에 미국 달러로 1천800여만불(189억7천여만원)을 쓴 칠레 정부와는 냉전(冷戰)이 벌어졌다.

   생환 광부 33명 중 31명이 지난달 중순 '영세 광산에 대한 안전 규제를 제대로 못 해 사고가 일어났다'며 정부에 1인당 한화 5억7천여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소송은 이들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미국과 그리스, 영국 등으로 호화 여행을 다녀오고 할리우드에 영화 판권을 팔던 광부들이 약자로서 피해를 호소하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광부 구출 작전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칠레 가톨릭대의 마트코 콜자틱 교수(경영학)는 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광산 규제에 문제가 있었던 점은 사실이지만 '더 큰돈을 벌려고 한다'는 지적 때문에 소송이 대중의 지지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反정부 여론에 무관심 커져 = 광부들의 생환기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논란 탓에 도리어 칠레 내에서 냉담한 시선을 받고 있다.

   피녜라 대통령은 지난해 사고 당시 구출 작전을 직접 지휘하며 언론에 '책임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부각했다. 광부들이 모두 지상으로 돌아온 작년 10월 그의 지지율은 70%가 넘었다.

   지금은 상황이 반대다. 교육과 노동, 환경 등에서 정부의 무능함을 성토하는 대형 시위가 잇따르며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난 6월 역대 최악인 31%로 추락했다.

   정부의 치적인 광부 구출 사건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대화에서 자취를 감췄다.

   산티아고 번화가에서 만난 기예르모 고로스티가(23)씨는 "피녜라 대통령은 너무 인기가 없다. 그의 이미지가 두드러졌던 광산 사고를 굳이 지금 얘기하고 싶지가 않다"고 말했다.

   발렌티나 에라로시오(29ㆍ여)씨도 "광부 33인의 얘기는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들은 피해자이고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고 잘라 말했다.

   칠레 정부는 사고 발생 1주년인 5일 산티아고 시내에서 광부들의 생환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지 않을 예정이다.

   22일 사고 현장 인근의 도시인 코피아포에서 피녜라 대통령과 광부들이 재회하는 행사가 추진되고 있지만, 정치적 상황 등으로 성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국외에서는 이 사고에 대한 관심이 여전하다. 5일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등을 초청해 광부들의 생존과 구출 과정을 되짚는 전시회를 연다.
 
ta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8/01 08:5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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