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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균_200911_새로 발굴된 보르헤스의 단편

2011-03-02l 조회수 2621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오래 전 단편이 망각의 늪에서 새로 발굴되었다. 보르헤스는, 역시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그의 추종자이며 평생의 벗이기도 했던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를 필두로 여러 작가와 종종 공동집필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은 이미 1972년 ????공동집필 전집????(Obras completas en colaboraci?n)으로 묶여 출간된 적이 있고, 누락되었거나 1972년 이후에 발표된 그야말로 수많은 글이 그의 사후에 전집 시리즈에 포함되어 속속 추가 발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새로 발굴된 공동집필 단편 ?엘로이사의 자매?("La hermana de Elo?sa")는 누락되어 있었다. 이 단편은 보르헤스와 아르헨티나 여성작가 루이사 메르세데스 레빈손(Luisa Mercedes Levinson, 1904-1988)이 1955년 발간한 동명의 단편집에 포함된 작품이다. 그녀가 리사 렌손(Lisa Lenson)이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하던 시절이다. 이 단편집에는 공동집필한 ?엘로이사의 자매? 외에도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끝?과 ?신의 글? 같은 보르헤스 단독 작품도 포함되어 있고, 루이사 메르세데스 레빈손의 대표적인 단편 두 편도 들어있다. 즉 모두 다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분량은 79쪽이었다고 한다. 루이사 메르세데스 레빈손은 1950, 60년대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에서 상당히 저명한 작가였다. 여러 언어로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고, 특히 환상문학 이론가로 일세를 풍미한 로저 카이와의 눈에 띄면서 프랑스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또한 문학사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선구자, 즉 콜롬비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보다 먼저 마술적 사실주의 경향의 문학적 성취를 이룩한 작가라는 후한 평가를 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망각의 늪에 빠지다보니 보르헤스의 전집에도 누락되는 불운을 겪은 것이다. 그런데 11월 초 마드리드에 있는 델 센트로 에디토레스가 이 단편집을 다시 출판하면서 공동집필 단편 ?엘로이사의 자매?도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딸이며 현재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인 루이사 발렌수엘라(Luisa Valenzuela)에 따르면 ?엘로이사의 자매?는 출판 시점인 1950년대 중반이 아니라 1946년경에 탈고한 작품이다. 1946년이면 보르헤스가 한참 대표작들을 쏟아내던 시점이며, 페론 정권하에서 한창 박해 받던 시절이기도 하고 또한 시력을 상실하기 전이다. 따라서 문학적 성취도 여부를 떠나 ?엘로이사의 자매?는 그 시절 작품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문학사적 가치가 충분하다(물론 발간 시점인 1950년대 중반, 즉 이미 보르헤스가 시력을 거의 상실한 그 시점에 두 사람이 다시 손을 보았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발렌수엘라마저 그 단편집을 소장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외국의 고서 수집상에게 선물 받으면서 비로소 수십 년 만에 다시 초판(초판이자 유일한 판본)을 볼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망각의 늪에 빠져 있던 단편이다. 발렌수엘라가 보기에 이 단편을 지배하는 아이러니한 분위기는 보르헤스와 그녀의 모친 작품에 공통적인 요소이다. 다만 부조리극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는 보르헤스의 문학 취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보르헤스 주변의 수많은 문인이 그랬듯이 루이사 메르세데스 로빈손도 공동집필 과정에서 보르헤스 덕분에 문학의 우주를 접했다고 회고한다. 지난 10월 29일 한국문학번역원과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ㆍ아프리카ㆍ라틴아메리카 문학 심포지엄 ≪경계를 넘어서≫에 그녀의 딸 루이사 발렌수엘라가 주빈으로 초대되었다. 그리고 핵심 세션인 <비서구 여성작가들의 목소리>에서 박완서, 사하르 칼리파(팔레스타인), 신디웨 마고나(남아프리카 공화국)와 더불어 여성문인들의 글쓰기에 대해 심도 깊은 강연을 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발표문에는 발렌수엘라가 어린 시절 작가 모친 덕분에 당대 아르헨티나의 손꼽는 문인들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실비나 오캄포, 베아트리스 기도, 시리아 폴레티, 엘비라 오르페, 알레한드라 피사르닉, 사라 가야르도 등등 당대 아르헨티나를 주름잡던 문인들이다. 하지만 루이사 메르세데스 로빈손은 그야말로 아르헨티나 문학의 대표선수라 할 보르헤스와 코르타사르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발렌수엘라는 71세가 된 지금도 모친과 보르헤스가 ?엘로이사의 자매?를 같이 작업하던 모습, 특히 두 사람이 연신 웃음을 터뜨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사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보르헤스는 이처럼 여전히 풍요로운 화젯거리와 기억을 낳고 있다. 문학의 생명력은 그런 것이다.